금성나씨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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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씨(羅氏)는 고대 중국 축융(祝融)의 후예로 광정(匡正)공이 나국(羅國)에 봉해지면서 나(羅)씨가 되었고 한고조 때 주(珠)공이 예장 땅 영주가 되면서 예장나씨(豫章羅氏)가
되었다. 당태종 때 상서좌복야 나지강(羅至强)이 고구려 정벌의 모의를 반대하고 망명길에 올라 지금의 나주 땅으로 왔다.
그 후 신라에 출사하여 좌승상에 오르고 자손들이 나주를 중심으로 세거하였고 신라 효공왕 때에 이르러 나 경(羅 璥)공이 나주나씨(羅州羅氏)로 관(貫)을 받았다. 그러나 소목계통을 밝히기어려워 연대계승이 소명한 삼한공신 대광 보국 금성부원군 충문공 총례(聰禮)를 시조로 하고 있으며 국가에서 펴낸 「고려사열전」이나 「해동성씨록」과 「문헌비고」 등 모든 문헌에서 나주나씨 시조는 나총례(羅聰禮)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 씨족은 고려와 조선조를 통해 7대광, 2상서, 4부원군, 6봉군을 배출했고 문과 59명, 무과 96명, 생진과 음사 570명을 배출한 명문 벌족이다. 그간 840여 년간 나주나씨(羅州羅氏)로 행관해 오던 우리 나씨는 1728년 이인좌의 난에 연루된 나씨(羅氏)와 한 고을에 같은 본관을 쓰고 있어서 같은 계통으로 오인누명을 염려하여 25년간 거평나씨로 이관했다가 1747년 나씨(羅氏)의 발상지가 금성이고 시조가 금성부원군이므로 금성으로 이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청사에 기록된 선조는 시조 충문공 나총례(羅聰禮), 회원대장군 나 유(羅 裕), 첨의참리 금성군 나익희(羅益禧), 계룡산 숭모전 삼은각에 배향한 예문관 제학 나계종(羅繼從), 조선조에 을사명현으로 세 차례나 문과에 장원하고 호당을 거쳐 대사헌을 역임한 송재 나세찬(羅世纘), 임진왜란 때 거북선을 제작하여 왜군을 격퇴한 나대용(羅大用)장군, 정유재란 때 의병장으로 순절한 일문삼절의 합천군수나 적(羅 迪), 국가지정문화재 물염정의 주인으로 충절의 으뜸인 창주 나무송(羅茂松), 구화 나무춘(羅茂春)형제, 3·1운동 때 민족대표 나인협(羅仁協)과 나용환(羅龍煥), 의열단 나석주(羅錫疇)의사, 광복군 나월환(羅月煥)장군 등이 있다.
파주의 고려 통일대전(統一大殿)에는 시조 나총례,10세조 나 유, 11세조 나익희, 15세조 나계종 등 네 분을 봉안했고, 나주의 경모사(景慕祠)에는 시조로부터 15세조까지 봉안하고 매년 5월에 전국의 자손들이 모여 상향제를 모시고 있다.
2017년 4월 20일
금성나씨대종회 문헌위원회 작성